본문 바로가기
Bravo My life in 밴쿠버

운수 좋은 날

by cheersj 2021. 2. 27.

 

 

어젯밤 꿈에 

어떤 건물에 들어가 조심스럽게 열어본 화장실 칸에

나방인지 날파리인지가 너무 많아 문을 확 닫아버렸다.

아 못가겠다 나 그냥 참아야 하나 

이러면서 밤새도록 헤매고 다녔다.

너무 돌아다녀서 아침에 피곤했다.

잠들기 전 딸아이 미술숙제를 도와주고 

각자 샤워 시원하게 하고 예쁘게 잠든 것 보고

난 마지막으로 미스트롯2를 시청하며 행복하게 잠들었는데

이게 뭔 꿈이야.

 

일주일 중 가장 바쁜 날이지만

불금의 보상이 기다리는 즐거운 금요일 아침

아들 딸 학교도 지각하지 않게 잘 보내고

나도 좀 이른 시간에 출근해

상쾌한 마음으로 업무를 시작했다.

오늘따라 더 향긋한 커피, 일도 순조롭고

참 행복한 아침

아 왜 이렇게 내가 기분이 좋지

모든 게 너무 완벽하다. 

이렇게 감사의 마음이 충만한 채로 오전 업무를 마쳤다.

 

점심시간

서로의 직장이 코앞이라 점심을 자주 같이 먹는 우리 부부

뭘 먹을까 문자를 주고 받으며 코트를 입는데

갑자기

놀라운 문자가 도착했다.

 

사무실 문 잠그고 보니 키가 안에 있어, 참 이따 열어주면 되겠네

 

남편의 사무실 열쇠를 가진 사람은

남편 그리고 나... 응 이따 열어달라고... 

그런데... 나?

1년 364일 갖고다니던 나의 소중한 열쇠 덩어리(?)를

딱 오늘 하루 

안 갖고 왔다.

 

나 오늘 열쇠가 없네?

 

남편의 헉 하는 소리가 귓가에서 환청처럼 들려왔다.

이제 어쩌지.

전문직을 갖고 있는 남편은 지금 1년 중 가장 바쁜 시즌에 접어들었다.

클라이언트 약속이 1시 2시 3시 계속 잡혀 있는 상황인데

사무실에 들어갈 수가 없다!

 

우린 차 키도 없어 그럼

집에 가 택시 타고?  

집은 어떻게 열어? 

집 키도 다 집 안에 거기 같이 있는데? 

 

이런 대화를 하다가 매니저 사무실에 컨택했으나 실패. 당황했다. 어쩌지.

다람쥐처럼 모든 게 재빠른 그 후배가 그립다, 그런데 하필 오늘 재택이다. 

대부분 동료들의 재택과 점심으로 텅빈 사무실을 둘러보니

또다른 10년지기 후배가 저기 앉아있다.

 

OO아 큰일났어... 얘기하며 열쇠 관련 전문가를 검색하려는데

후배가 말하길

 

Lock Smilth 전화 해도 바로 안와요... 한국 사람한테 해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래서 제가 해 본 경험 있어요..

 

하더니 식당 휴게실로 향했다.

식당에 들어가니 이제 입사 1년 남짓 된 프로그래머가 점심을 먹고 있었다.

후배는 의기양양하게 식당 집기 통에서 과도를 꺼내 들었다.

 

이걸로 열어 봤어요 집에서... 그런데 사무실 문엔 이거보다 더 큰게 필요할까?

 

대화를 듣던 프로그래머가 먹던 점심을 놓고 일어나더니 

과도보다 훨씬 큰, 한여름 간식타임 수박 써는 데 사용하던

무서운 주방용 식칼을 집어들더니 따라나섰다.

 

왜? 점심 먹어요 그냥 

했더니 

아, 혹시 도움이 될 수 있을까 해서요... 

한다. 

 

그렇게 우린 긴긴 빌딩의 복도를 따라 셋이 나란히 걷게 되었다. 

맨앞의 난 종종걸음으로 전화기를 쥔 채 번호를 검색하며

두번재로 따라가는 후배는 한손에 과도를 비장하게 들고

그 뒤를 프로그래머가 큰 식칼을 들고 의기양양하게 걷는

한인타운에서 보기드문 진풍경이 연출되고 있었다. 

 

그동안 남편이 찾아낸 열쇠 전문가가 30분안에 오기로 했다는 문자가 왔다.

그래도 이왕 나선 길이니

칼을 뽑았기에 시도는 해봐야겠다며 남편 사무실에 도착했으나

이웃 사무실 동기들과의 대화를 끊고 나타난

우리 칼 부대의 모습에 그들은 적잖이 당황한 모습이었다.

난 그분들에게 우리 동료들을 인사시켰다. 이게 무슨 그림이람. 

 

그냥 이걸로 한번 해보려구요

평소 우리 신랑을 형부라 부르는 후배가 말했다.

그리고 곧 수줍게 뒤돌아섰다.

아 근데 이런 문은 안되겠네요 보호장치가 있어서... 

 

에이구, 널 믿은 나도 참. 

암튼

열쇠 전문가 아저씨가 정말 30분만에 출동하더니 1분만에 뚝딱 열어주셔서 해결했다.

얼마를 불러도 기꺼이 내며 감사할 판인데

그래도 그냥 깔끔하게 100불 부르시길래 넙죽 절하며 드렸다.

정말 감사했다.

 

운수 좋은 날이다. 

 

 

 

그리하여 난

단지 남편의 1초 실수와 나의  한번 깜빡 실수로 인해

단 1분만에 100불을 날리게 되었다. 

그것도 너무 감사한 마음으로.

100불이면 우리 아이들이랑 Meadow Restaurant에 가서 맛있는 저녁을 먹을 수 있는데...

아, 이번 주말은 속죄하는 마음으로 가지 말아야겠다... 

 

그렇게 하루를 무사히(?) 마치고 드디어 퇴근해 다 모였다.

금요일 밤이다. 암튼 신난다. 

 

평소 퇴근길 들르는 Driving Range에서

난 Steam works Pale Ale 한잔으로 

파란만장한 하루의 피로를 풀고 있었다.

아이들은 저녁 겸 간식으로 많은 메뉴를 주문했다.

그것도 연습 끝나고 올 떄마다 한명씩 따로따로.

마지막에 아들이 연습을 끝내고 와서 추가 주문을 했을 때

내가 잔소리를 했다.

이미 주방을 닫는 시간이 되었고

나와 친한 매니저는 뒷정리로 바빴다.

그리고 내가 싫어하는 그 여자가 홀로 진공청소기를 돌리는 중이었다. 

 

식당 이제 닫았어, 미안해서 못 시킨다..

그리고 Fry좀 그만 먹어라.. 집에 가서 고기에 밥 줄게 응?

 

그러나 결국 아들의 애교에 넘어가고 말았다. 

어차피 매니저 Li Ling은 문 닫으려 정산 하다가도 우리 애들 배고프다 하면

나중에 페이 하라며 바로 음식을 해주기에...

미안한 마음으로 지갑을 찾는데

 

없다

지갑이 없다?

 

헉 

거기 뭐 있지

멍해진 머릿속을, 그 안에 든 모든 것들이 필름처럼 하나씩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신분증, 신용카드, 은행 직불카드, 남편 아기때 사진 그리고 가족 사진 

게다가 오늘 남편이 준 현금 500불과 클라이언트에게서 받은 법인 체크 

 

눈앞이 노래지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가방을 다 쏟아 뒤지다가 혹시나 하고 달려가 본 캐쉬어 앞

거기에 내 검은 장지갑이

나 가져 가세요 하고 

갈색 예쁜 100불자리 지폐 끄트머리를 곱게 내민 채 

뻔뻔하게 놓여있었다. 

 

따라온 아들이 냉큼 말했다.

 

엄마, You are welcome

 

본인이 마지막 추가 주문을 부탁하지 않았다면

엄마는 지갑을 저렇게 두고 그냥 집에 갔을 거라고...

고맙지? 하며 웃었다...

순간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캐쉬어 바로 옆엔 나와 사이 안 좋은 그녀가 청소를 하고 있었다.

만약 내가 이대로 집에 돌아가고 그녀가 이걸 발견했다면 

내게 돌려줄 수도 있겠으나... 만에 하나... 아닐 수도 있으리라.

필리피노를 향한 인종차별도 아니고 직업에 대한 선입견도 절대 아니다.

그냥, 매니적 빽 믿고 안 나가려는 나와

굳이 밀어내고 청소를 해야 하는 그녀와의

평소 좋지 않았던 앙금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미안했다. 잠시 그런 생각을 했던 내가 싫었지만 

다행이라는 안도감에 죄책감도 곧 잊었다.

아, 비록 낮에 100불은 날렸지만

신분증 재발급에, 은행과 카드회사에 전화하는 수고, 클라이언트에게 사정을 말해야 하는 당혹스런 일을 피했고

게다가 다시 찾을 수 없는 남편 아기때 사진과 현금 500불은 날리지 않았다. 

 

휴 정말

운수 좋은 날이다

'Bravo My life in 밴쿠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음의 병  (6) 2021.03.05
화요일의 슬픔  (14) 2021.03.03
아침에 찾아온 불길한 징조  (14) 2021.02.24
금요일 밤, 바람이 분다  (10) 2021.02.20
내 딸의 첫사랑  (13) 2021.02.18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