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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avo My life in 밴쿠버

워킹맘의 Volunteer Hour 채우기

by cheersj 2021. 6. 13.

 

해마다 5월이 되면 

나는 딸의 학교에 가서

새빨갛고 긴 졸업가운 50개를 낑낑 들고 나와 

열심히 차 트렁크에 싣는다. 

 

집에 오면 다시 열심히 옷장으로 실어나른 뒤

가지런히 걸었다가

일을 시작한다. 

 

세탁기에 찬물 사용 Gentle Wash를 선택한 뒤

5장씩 10번을 돌려 세탁이 끝나면

한장씩 펼쳐 

앞 뒤 소매 살살 돌려가며 

열심히 땀흘리며 다림질을 한다. 

퇴근 후 5장 혹은 10장씩 일주일 동안 할 때도 있고

어떤 해는 주말 이틀을 꼬박 보낼 때도 있었다.

 

1년에 72시간의 Volunteer Hour를 채우기 위해

학교에 필요한 일들에 봉사해야하는데

매일 출근하는 워킹맘인 나로선

이벤트 도우미나 성당 봉사, 도서관 정리, 운동장 수퍼바이저 등

학교내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하지 못하니

1년에 한번 졸업생들의 견진성사 가운을 세탁하고 다리는 업무를 해왔다.

아들이 입학했을부터 시작해 이미 졸업했고

아직 딸이 계속 다니고 있으니

아마도 이 일을 8년째 하고 있나보다.

 

올해는 코로나때문에 졸업행사가 미루어져

다음주에 견진성사가 있다고 해서

어김없이 월요일에 가운을 픽업해 왔다. 

그리고 금요일까지 갖다 주기로 했는데

클로짓 두개를 꽉 채운 빨간 가운들이

올해따라 왜이리 안 예뻐보이는지

이틀만 미뤘다가 벼락치기를 하기로 마음 먹었다.

 

수요일 목요일에 끝내야 한다. 

수요일 좀 일찍 퇴근해

다들 좋아하는 Bubble World에서 주문한

맛있는 타이완 치킨과 볶음밥으로 이른 저녁을 해결한 뒤

다들 필드를 내보내고 나면 음악을 틀고 일을 시작해야지 하는데

남편이 꼬시기 시작했다.

모처럼 일찍 퇴근했는데 필드에 같이 가자

카트 타고 딸 태우고 맥주 마셔라 딸이 같이 가고 싶어한다  

가운 다림질, 같이 하면 금방 할 수 있다 뭐 이러면서... 

 

결국

말려들었다.

갔다 오니 밤 9시 반.

내게 가운에 손 댈만한 에너지는 남아있지 않았고

내일 학교 보낼 준비도 부엌 정리도 하나도 안 되어 있었으며

새빨간 가운들이 날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 할 거냐며. 

우씨 말렸다 말렸어 하며 후회 반 삐짐 반 씻고 나왔더니

남편이 씩씩하게 가운을 다리고 있었다.

10개만 하고 자자 내일 또 같이 하게. 

나보다 손이 빠른 남편 손에서 쓱싹 쓱싹 완성된 가운이 15개가 넘어가자

내 기분이 좀 풀려

달콤한 잠에 빠져들었다.

 

이제 하루 남은 목요일

아직 30장의 가운을 끝내야 하지만

영화보며 놀면서 같이 하자 그럼 금방해, 그렇게 얘기하며 출근했던 남편이

집에 와서 배가 아프다며 쓰러졌다.

낮에 먹은 순두부가 체했는지 커피를 너무 많이 마셨는지

오후부터 위가 꼬이는 것처럼 아프다며

방까지 올라가지도 않고 소파에 누워버렸다.

이런

혹시 꾀병 아니지? 

 

그날 밤 난

밤 1시까지

중간 중간 맥주를 에너지 드링크삼아 마셔가며

나머지 가운 30개를 무사히 다린 뒤

곱게 곱게 펼쳐 잘 걸어두었다. 

 

소파에서 잠든 남편은

그냥 버려두었다.

배는 왜 하필 오늘 아팠을까

그러면서 

내일 병원을 데려갈까 한의원에 갈까 잠시 생각하다가

이불을 굉장히 불친절하게 훽~ 덮어주고는

버려두고 올라와버렸다.

 

그리고

아픈 어깨를 혼자 두드리며

그래도 뿌듯한 마음으로

장렬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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