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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avo My life in 밴쿠버

쓰디 썼던 하루... 그러나 이겨낸 뒤 마시는 맥주는 달다

by cheersj 2020. 11. 13.

 

아침 7시 카톡이 울렸다.

후배가 의논할 게 있다고 했다.

뭐지? 열어보니

"어젯밤부터 기침을 좀 하는데 오늘 출근 해야 할까요?"

 

아... 이 무슨 애매모호한 상황이란 말인가.

기침을 차라리 죽도록 많이한다고 하든가

별로 심하지 않으면 그냥 일단 출근을 하든가

알아서 했으면 좋으련만

힘없고 정의감만 넘치는 날 건드리면

난 또 그분과 오늘 싸워야 하나.

 

딸래미 도시락을 싸며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카톡을 시원하게 날렸다. 

내 맘이다. 

"오늘 재택 근무 하시게"

 

그리고 출근해서 최대한 공손히 문 두드리고 들어가

"기침이 너무 심해서... 지금 이런 상황에선 혹시 모를 위험이 있고

다른 직원들에게 피해를 줄까 우려되어 불가피하게 재택을 하도록 권했습니다"

보고했다.

내가 그 전날 해 놓은 업무처리가 맘에 드신 탓인지

나이스 하게 넘어갔다.

응. 이정도면 됐지. 생각보다 양호하다. 

 

돌아오니

다른 후배가 다급하게 불렀다.

"큰일 났습니다. 이메일 보셨나요?"

헉, 또 뭔데...

본의 아니게 타사에서 컴플레인 받을 일이 일어났다. 

물론 다 내 책임이지. 

잘 풀면 작은 일, 잘 못 풀면 진짜 대박 큰일, 맞다.

아, 오늘 하루 시작이 왜 이러냐...

괜찮아 괜찮아 잘 해결할 수 있어

하는 마음과

집에 가고 싶다

이제 다 그만 하고 싶다

하는 두가지 마음 중에서

여느때처럼

난 일단 도망치치 않기로 했다. 

 

다시 상황을 보고했고 돌아온 답은

"흠. 그래요 큰일이군요, 잘 대처하세요"

역시나 대책은 내가 세우고 실행도 내가 할 일.

급한 업무부터 달려 달려... 끝내버리고

진심어린 사죄와 재발방지책

게다가 더 끈끈한 공조 협력을 원하는 마음을 담아

공들여 답변을 작성해 보냈다.

 

퇴근시간, 한국 아침 시간이 되자

바로 답이 왔다.

신속한 답변에 감사드린다는 첫 도입부를 읽으며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일단 또 해결해 갈 수 있겠다. 

 

어느새 밖은 어둑해져 있었다.

학교 갔다온 딸래미 얼굴도 못보고

픽업 간 아빠 전화기를 빌려 'Hi Mom' 따뜻한 인사와 이코티몬 그리고 하트를 보낸 딸에게 

답 하트를 보낸 게 다였는데

어느새 퇴근시간이 되었다. 

 

20여년 전 대기업 임원이었으며 게다가 천성이 전형적인 조선시대 마인드이신 상사에게서

괜한 잔소리 듣게 하기 싫다며

아무리 바빠도 아이들 픽업은 꼭 본인이 도맡아하며

아주 심하게 힘들었던 날, 스트레스가 폭발해 욕을 바가지로 쏟아내면

같이 욕하고 들어주며 맞장구 쳐주다

급기야는 

당장 내일 아침에 가서 때려치우라고

노동법을 읊어주며 호기롭게 말해주는 

나의 남편

 

그리고 10년지기 선배가 억울하게 밀려나 박스 들고 떠난 날

서럽게 울던 내게 맥주를 서둘러 가져와 따라주며 위로하던

우리 듬직한 아들

 

엄마 회사 그만 두고 우리 딸이랑 맨날 같이 있어줄까 

하고 물으면

"엄마, 괜찮아 난... 엄마 일해야지 make money하지"

"헉 우리 돈 있어, 아빠가 더 많이 벌면 되잖아"

"아, 그래도 엄마... 돈은 계속 없어지는 거니까 같이 많이 많이 버는 게 좋지"

9살 인생을 담은 현명한 답을 내 놓는 우리 깜찍한 딸

 

가족의 품에 돌아왔다. 

나의 오늘 하루는 썼으나

이겨내고 나서 마시는 한잔의 맥주는

사랑하는 가족들의 위로 만큼이나

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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