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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avo My life in 밴쿠버

아직도 속이 비었거나 혹은 철이 없거나

by cheersj 2020. 12. 29.

 

지금은 어느덧 낼 모레 50 중반을 바라보는 나이가 된,

가까운 언니가 있었다.

그녀는 항상 명랑 쾌활하며 머리부터 발끝까지 빈틈없이 치장을 하고 다녔기에

항상 화려하고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이었다.

 

아주 오래 전 

그녀의 두 딸이 어릴 때, 그리고 우린 아이가 없을 때 다같이 갔던 한식당에서

불판에 지글지글 고기가 익는 동안 아이들이 식탁에 기어오르려 하는데도 아랑곳 않고

그녀는 열심히 양념갈비가 구워지자마자 본인의 입에 넣느라 바빴다.

그녀의 남편은 아이 하나를 옆에 끼고, 하나는 주저 앉히며 한입이라도 더 먹이느라 바빴다.

우린 그저 그런 장면들과 어수선한 식사자리에 익숙하지 않았기에

머릿속이 하얗게 되더니 멍해져서 밥이 어디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겠고

정말로 아기를 갖고 싶지 않다는 우리 생각이 참 올바른 선택이구나 싶었다. 

 

그녀는 좋게 말하면 순진했고 남편에게 맹목적이었으며

별로 착하지 않게 말하면

속이 깊지 못하며 철이 없었고 남편의 친절과 자상함에 속아

그 뒤에 숨은 거짓과 허풍은 깨닫지 못했다. 

집을 일단 팔자, 이유는 중국으로 가 사업을 확장할 계획이란 말에

친정에서 장만해 준 집을 허망하게 팔고 떠났다.

중국이 아닌 한국으로.

 

사업을 하겠다는 남편 말을 하늘같이 믿고 투자를 하고

친정에서 끝까지 어떻게든 도움을 받아내고...

결국 우여곡절 끝에 남편은 어느 나라엔가 또 사업을 하신다고 가 계시고

이 언니는 생전 하지 않았던 돈벌기에 나섰다. 

영어 과외 선생님에 도전한지 몇년, 이제 꽤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는 소식에

응원과 격려의 마음으로 정말 오랜만에 통화를 했다. 

 

첫 대화는... 너무 반가웠다.

어쩜 그렇게 훌륭하게 새로운 일을 잘 하고 있느냐고 격려하자

약 20분간 본인이 어떻게 아이들을 가르치는지 설명했다.

그것도 정말 열심히 들어주며 문득 생각이 났다. 

아주 오래 전 내가 한참 회사 일로 바쁠 때 전화했던 이 언니는 

자기 남편은 경제적으로 아무 신경을 쓰지 않게 해주기에

집 전기값이 얼마 나오는지도 모른다며 웃었었다.

수다 끝 우연히 나온 얘기였지만

참 속도 없다, 철도 없고

그렇게 생각했다.

나이 한참 어린 친한 동생이 유학생으로 와 이민 준비다 뭐다

직장생활하며 열심히 버티고 있는데

거기다 대고, 그것도 일하던 사람 붙잡고 할 소린가. 

그래도

정이 들고 순수함이 좋아 그냥 그렇게 가끔 보며 잘 지냈었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지금

그때의 느낌이 또 되살아났다.

아, 사람은 변하지 않는구나.

재밌고 좋은데

참 공허하다.

어차피 이젠 이쪽에서 위로와 격려를 보내주고 싶은 입장이므로 

그 30분의 공허한 시간이 크게 아깝지는 않았으나

전화를 끊고나서 많은 생각을 했다. 

 

물론 현실의 벽이 있기에 대부분 그렇지 못하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내 시간의 귀함을 알게 될수록 

 

난 이런 사람과의 인연만을 소중히 만들어가고 싶다. 

'깊은 대화를 하고나면 그 말들이 허공에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꽉 채워지는 사람

 글을 나누고 나면 공감의 따뜻함이 절로 느껴져 가슴이 뿌듯해지는 사람

 술 한잔 나누고 나면 정다움이 더해지다 못해 잠시 뜨거워질 수 있는 사람'

 

소중한 사람과의 인연만을 지켜가기에도

주어진 시간들은 너무나도 빠듯하고 소중하기에.

 

한편

다시 나를 돌아보고 다짐해 본다.

몇년이 흐른 뒤 나의 모습은

어른다운 모습에 한층 더 가까워져 있기를.

이젠 철이 없다는 말이 우스울 정도로 어울리지 않는

그냥 그렇게 속 없는 사람으로 여생을 살아갈 것임을 들켜버릴 

그런 충분한 나이가 되어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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