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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avo My life in 밴쿠버

유서

by cheersj 2021. 2. 4.

 

하루의 일과를 무사히 마치고 나서

나에게 주는 휴식의 시간에

난 주로 내 자신에게 달콤한 맥주 한잔을 선물한다.

그리고 거기에 곁들여

남편과 넷플릭스에서 신중하게 고른 영화 한 편을 함께 보거나

아이들이 늦게 잠들어 영화 볼 시간을 놓친 밤엔

혼자 전화기에 이어폰을 꽂고

한국 드라마와 쇼 프로그램을 즐기다 잠이 들곤 한다.

 

어젯밤

잠들기 싫어 버티는 아이들을 협박해 겨우 재워놓고

남편도 침대에 곱게(?) 뻗어 있는 것을 확인한 후

(아이들도 남편도 잘 때가 젤 예쁘다) 

난 또 혼자만의 시간을 즐겼다.

 

싫어하는 부분은 돌려버리고 관심있는 부분만 골라 볼 수 있는 스트리밍 서비스

고맙다.

나의 선택은 노사연 이무송 부부의

28년 결혼생활을 짚어보며

오랜 갈등 끝 서로 화해하는 모습이었다.

그 중 어떤 장면에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나왔다.

상담 전문가의 권유에 따라 

서로에게 유서를 써보는 기회를 가진 두 사람.

물론 나와는 너무 동떨어진 세계에 살고 있는 방송인이고

연배도 훨씬 높은 부부이지만

서로 아끼면서도 안타깝게 갈등을 반복했던 부분들을 털어놓을 때

나도 모르게 공감이 가고 마음이 아팠다.

유서를 서로 읽어주는 시간

담담하게 써내려간 그들의 얘기를 들으며

난 어느새 

나의 유서를 머릿속으로 쓰고 있었다. 

 

나의 유서

그 시작의 말은 

'미안해'였다.

이제 곧 헤어져

다른 세상에 존재하게 될 거라 상상하니 

미안한 마음과 후회되는 일들만 가득 떠올랐다.

 

우리야 말로 

모든 것이 아름다웠던 20대에 만났다. 

꼭 붙어있다가 헤어져 들어와서도 바로 그리워 전화통화를 하면

아직도 떠나지 않고 집 앞에 있던 남편

그리고 내가 잠들 때까지 전화를 끊지 않고 얘기를 나누던 남편

잠시 떨어져있던 한달동안

매일 밤 전화통을 붙잡고 지구 반대편에 놓여진 슬픔과 그리움을 나누다가

만난지 6개월만에 같이 떠나기로 선언했던 우리

그렇게 어린 나이였는지

그때는 몰랐지.

 

그런데

난 지금 뭔가.

어젯밤에도 그제 아침에도

남편을 귀찮아했다. 아주 잠깐이지만.

 

어쩌다 내 금쪽같은 아들에게 잔소리를 하면

눈에 불을 켜고 변호 내지 항변을 도맡아했으며

그런 내게 서운해 하며 조금이라도 화를 내면

뒤통수를 째려보며 한대 쥐어박는 상상까지 할 정도로 미워했다.

 

그 옛날 

너무나 멋져 반하기까지 했던 

큰 키에 떡 벌어진 체구

지금은

자꾸 날 따라다니는 귀찮은 '거구' 로 느껴질 때가 있으며

어울리는 새 옷을 입으면 

내 눈에 넘치는 하트를 숨기지 못할 정도로 반했던 건 옛날 얘기.

지금은 

응 괜찮네, 뭐 옷 값어치를 하니 다행이네. 

이런 생각을 하는 나.

 

그 옛날

너 한입 나 한입

서로 떠먹여 주며 행복하게 받아먹던 나

지금은

아이 정말

그냥 좀 따로 먹자고

코로나 시대라고...

 

내가 왜 이렇게 변한 걸까.

생각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래도

어떤 글귀를 읽고 눈물 글썽였던 적도 있다.

지금 내 곁에 있는 그 귀찮은 남편이

어느날 내 곁에 없는 순간이 올 수도 있다고.

물론 내가 없을 수도 있겠지만

어떤 경우가 더 나을 것 같다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가슴이 먹먹해진다.

 

뭐하냐고 계속 찾고 귀찮게 부르는 소리

뭐 먹자고 따라다니고 걸리적거리는 모습

이날치의 '범 내려온다'를 부르며 춤까지 따라하는 엉뚱함

자기 일 문제 처리할 때 날카롭게 변하는 의외의 진중함

 

또 뭐가 있을까 

딸을 무등 태우고 아들과 킥복싱을 하는 좋은 아빠의 모습

분리수거 날 쓰레기를 싹 정리해 집앞에 내놓는 깔끔한 가장

 

응, 꽤 많구나.

내일 아침 남편이 내 곁에 없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오늘 하루 또 다른 하루

매일 매일 온전히 감사하고 예뻐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 맞다.

 

마음 속으로 잠시 유서 써 보기를 해보니 반성이 되는 듯 하다.

관속 들어가보기 체험도 있다는데 그건 너무 무서울 듯.... 

이걸로 충분히 반성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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