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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avo My life in 밴쿠버

이번 생은 할 수 없다

by cheersj 2021. 2. 10.

 

비오는 밴쿠버라는 말이 무색하리만큼 맑고 화창한 일요일이었다.

우린 여느때처럼 아니 다른 날보다 더 설레는 마음으로 필드에 나갔다.

오랫동안 내린 비로 땅은 아직 질퍽했지만

그래도 그렇게 예쁜 하늘을 즐기는 게 정말 오랜만이었기 때문.

 

그 진상은 처음 티샷 때부터 눈에 거슬렸다.

앞 팀이 11시 48분 티타임, 우리 가족이 57분이었는데

앞팀 풍채 좋은 백인 아저씨들이 다 모이기도 전에

어떤 오렌지 가이(guy) - 아이들이 붙인 이름- 가 혼자 시간도 안되었는데 치고 나가버렸다.

혼자 예약했기에 다른 일행과 합류하기 싫은 건 이해하지만

그렇게 자기 시간을 안지키면 뒷사람들은 황당하게 기다려야하고 순서가 밀리게 된다.

암튼 뭐 저런 사람이 다 있지 다들 그렇게 나름의 스타일대로 불평을 했지만

곧 자기 차례에 치고 기분좋게 나가기 시작했다.

 

새 간식으로 선택한 Pork Jerkey를 아이들 입에 한입씩 넣어주며

나름 운동의 기쁨을 즐기며 걷던 순간 갑자기 그 오렌지 가이 놈이 나타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내 웻지 봤어? 내 웻지 본 사람 있냐구"

지가 치던 홀에서 거꾸로 내려오며

한참 골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소리소리 지르며 지나가는 거였다.

정말 욕이 나왔지만 아이들 때문에 참았다.

 

그렇게 거슬러 올라가며 필드를 뒤져 골프채를 찾아냈나보다. 

그것까지는 그러거나 말거나

갑자기 우리가 시작해야 할 7홀에서 티샷을 쳐버리는 게 아닌가.

우린 방금 6홀을 끝내고 7홀 티박스에 거의 다 온 상태였으니 몰랐을 리가 없다.

이건 또 무슨 짓인가.

채를 찾았으니 찾은 장소에서 그냥 막 쳐버린다.

외모와 말투를 보니 중국계 캐나다인이다. 나이는 우리 정도.

와, 그냥 중국 사람이면 너희가 그렇지 하는 편견으로 견뎌주겠다만

여기 꽤나 산 사람 같은데 저런 똥매너로 이런 델 다니면

같은 아시안 외모를 가진 우리까지 부끄럽게 만드는 것 아닌가. 너무나 화가 났다.

 

순간 맨앞에 걷고 있던 아들이 갑자기 그 사람을 불러세웠다.

요약하자면, "저기요 아저씨, 웻지 찾았으면 저 앞의 본인 차례의 홀에 다시 가서 

그 타임에 맞춰 치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뭐 이런 내용.

존댓말이 없는 언어, 그래도 나름 정중하게 말했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아시안 아저씨가 듣기엔 당돌하게 들렸을 수도.

당황한 그 진상이 횡설수설 고함치고 화를 내며 무례한 발걸음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아들이 다시 말했다.

"전 겨우 열네살이고 그냥 묻고 있을 뿐인데

어른인 아저씬 왜 갑자기 화를 내는 거죠?" 

아,

더 당황하고 화가 나 이성을 잃은 그 진상이 급기야

내 귀하디 귀한 아들에게 소리쳤다.

"Shut up!!"

 

말리려던 내 눈에서 불꽃이 튀며 바로 뒤집혔다.

"너 지금 내 아들한테 뭐라고 했어? 사과 안해? 당장 사과해, 뭘 잘했다고 큰소리야

어른이 행동을 똑바로 해야지. 할 말 없으니 화나 내고!"

그랬더니 슬금슬금 뒷걸음 치며 꿍얼거렸다.

그건 내 호통에 기가막히기도 했겠지만 뒤에서 남편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뒤돌아 도망치듯 가버리는 그 진상에게 나도 소리쳤다.

"사과 못해? 내 아들한테 사과하라고!"

"뭐라고 중얼거려, Shut up~~~!!!!"

그렇게

나의 시원한 외침은

넓디 넓은 필드에 메아리치듯 울려퍼졌다.

 

내 아들에게, 그런 소리를, 게다가 호통을 치다니.

그놈을 용서하고 싶지 않았으나

일을 더 확대시켜 좋은 시간을 망치는 것은 어리석은 일 같아 애써 진정시켰다.

그러나 속마음은 드라이버를 들고 뛰어가 뒤통수 한대 갈기고 싶은 심정이었다.

 

마침 골프장을 관리감독하는 마샬이 카트를 타고 지나갔다.

남편이 점잖게 불러 세워 자초지종을 설명했고

그 정의로워 보이는 마샬은 아들에게 옳은 일을 했다고 칭찬했다.

그렇게 골프 에티켓이 없는 사람은 여기 오면 안된다.

몇시 누구인지 따져보더니 바로 파일에 올려 경고하겠다며

부디 남은 홀 즐겁게 치길 바란다고 사라졌다.

 

난 순하디 순한 우리 아들이 그런 상황에서 따질 줄 안다는 게 기특하긴 했으나

내가 화를 못참고 소리를 지른 것은 잘한 일인지 아닌지 생각해봤다.

그래도 그렇게 안했으면 난 잠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그냥 난 이렇게 살아야 하는 사람인가보다.

남편 의견은 조금 달랐다.

"어른한테 의견을 얘기하는 건 좋지만

존댓말이 없는 언어의 특성을 고려해

이봐요 보다는 Sir, 이렇게 시작했다면 좀더 정중하게 들릴 수도 있지." 하는 내용. 

난 정중할 필요 없는 놈이라고 아들 편을 들면서도

어느정도 수긍은 했다. 

이런 걸 대충 넘어가지 못하는 몹쓸 성격이 엄마를 좀 닮은 것 같아

씁쓸하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한 이상한 마음으로 

그냥 엄마의 Shut Up에 도망갔다며 다같이 웃고 말았다...

 

얘들아 

아무래도 이번 생은 할 수 없다. 

엄만 그냥 이렇게 살련다.

너희들이 알아서 배울 것만 배우고 아닌 건 배우지 말아라.

그래도 아빠를 반 닮았으니 

잘 절충해서 지혜롭게 살아가길 바란다.

살다보면

상식적이지 않은 사람도 많고 억울한 경우도 생기기 마련이니

항상 당당하게 그러나 지나치지 않게

지혜롭게 대처하는 사람으로 잘 성장하길 기도한다.

미안하다 그리고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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