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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avo My life in 밴쿠버

눈물 덜어놓기

by cheersj 2021. 3. 8.

 

세상에서 하나뿐인 내 동생

내가 다섯 살이 되어가던 어느 크리스마스에

온 가족이 나와 오빠를 할머니에게 남겨두고 어디론가 사라졌었고

우린 거실 카펫의 물결 무늬 문양을 도로 삼아

미니카를 갖고 레이스를 하며 놀았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몇일 뒤

인형같이 작은 아기가 내게 동생이란 이름으로 찾아왔었다.

 

그렇게 시작된 우리의 인연은 

각별하고 가슴 아프다.

극성스런 엄마 밑에서

우리 오빤 순종적이고 듬직한 큰아들

난 매사에 승부욕 강하며 반항심 많은 큰 딸

뭐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아무 생각 없는 막내 

우리 셋

서로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녀는 

이 지구상에서 나와 가장 반대되는 캐릭터를 찾아내려 한다면

1등으로 선택될 만큼

정반대의 성향을 가진 나의 하나뿐인 동생이다.

 

초등학교 때

누구누구네의 동생이라는 말도 싫고

특출나지 않은데 주목 받는 것도 정말 싫다며

걸핏하면 뚱보라 놀리는 아이들을 뒤에 달고

6학년 교실을 찾아와 문 두드리며 울던 동생  

어느 날, 마침 학급 회의를 주관해야하는 순간이었던 나는

창피한 마음에 문을 쾅 닫아버리며 말했다.

얼른 가, 나 바쁘다구.

 

그녀의 중학생 시절

담임 선생님과의 면담을 위해 학교에 다녀온 엄마가

불같이 화를 냈다.

'지극 정성'의 또다른 이름이 '극성' 엄마인가

암튼 그런 강남 엄마의 표상인 우리 엄마에게

동생의 담임 선생이 직언을 했던 것 같다.

공부에 집중을 못하고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다는 둥...

나름 자긍심으로 가득 차 있던 엄마는 노발대발 눈이 뒤집혀

내 인생에서

자식 가르치는 선생에게서 이런 말 들어보긴 처음이라며

거품을 물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앞엔

역시나 아무 생각없어 보이는 동생이

큰 눈을 꿈뻑꿈뻑하며

덩그라니 서 있었다.

 

물질적 풍요와 정서적 결핍의 혼돈 속에서

그래도 묵묵히 자라던 동생은

예견된 순서인 듯

중2때부터 제대로 어긋나기 시작했다. 

엄마가 믿고 맡겨 놓은 호주 유학파 영어 선생은

현실 도피와 이상향을 꿈꾸는 운동권 출신이었고

그와 그를 따르는 학생들이 추종자가 되어

밤늦도록 술을 마시고 담배 냄새까지 쩔어 집에 들어와

온 집안이 발칵 뒤집히기 일쑤였다. 

 

그러던 어느 봄날

당연하듯 누렸던 것들이 하루아침에 날아가 버렸고

성처럼 우릴 지켜주던 그 집에서 쫓기듯 나와야 했다. 

누구도 우리의 삶에 그런 풍파가 올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었다. 

 

몇달 뒤

경매를 기다리는

겉모습은 궁전같은

그러나 의자 하나 없이 텅 빈 그 집에 다시 돌아갔을 때

우리 셋만 남았다.

언제나 날 반겨주던 우리 맥스도, 집안일을 돌봐주던 아주머니도,

항상 웃으며 날 지켜주던 기사 아저씨도 없었다.

우리 셋이 살아남아야 했다. 

 

아무것도 할 줄 모르고

아무것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던 우리 셋은

그렇게 거기서 

1년을 버티며 살았다. 

 

그렇게 고1을 맞은 동생이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가기 시작했다.

삶은 계란 두개를 도시락으로 싸서 새벽부터 학교로 향했고

다녀오면 책상 앞에만 앉아있었다.

 

입학식때만 해도 

온갖 아름다운 꿈에 부풀어 있던 나는 

갑작스런 충격과 슬픔으로 늦은 방황을 시작했다. 

수업도 땡땡이 치고 낮술부터 시작해 밤의 향락에 빠져 온종일 놀고는 

늦은 밤 만취해 초인종을 누르면

어느새 동생이 미친듯이 뛰어 나왔다. 

걱정과 잔소리를 퍼부으며 옷을 갈아입혀 씻기고

기도로 나를 재우며

밤늦도록 다시 공부에 매달리던

그 뒷모습이 아직도 어렴풋이, 그러나 선명하게 떠오른다.

 

나를 정신차리게 했던 건

가끔 만났던 엄마의 눈물도

오빠의 아픈 꾸지람도 아니었다.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동생의 모습 

그리고 시련앞에 힘없이 무너진 나를 보살피며

본인의 아픔보다 더 아파했던  

동생의 마음이었다.

 

그 곳에서 우리 셋은 성장했다. 

지난 세월보다 그 짧은 시간동안 몇갑절 더 성숙한 인간이 되어

비로소 그 궁전을 나왔었다.

 

엊그제

New Jersey에 살고 있는 동생에게서 카톡이 왔다.

"언니, 박사 과정 수료식에 참석할래? 링크 보내줄게....

 드디어 박사가 되긴 되나보다..."

 

눈물이 왈칵 솟아 올랐다.

드디어 해내는구나...

 

그 시절 그녀는

술취한 언니를 돌보고 계란 두개로 하루를 버티며 공부해

성적과 인성으로 뽑힌 반장은 형편이 안돼 정중히 고사했으며

책상 앞에 써붙였던 목표대로 학교를 갔고

혼자 힘으로 대학을 마쳤고 

장학금으로 대학원까지 그리고 유학을 가

그리고 예일대 대학원에 박사과정까지...

다 해내고 말았다. 

 

이렇게 긴 세월이 흘렀는데도

그녀는 아직도 가끔 얘기한다. 

그 시절 

뒤늦게 정신 차린 내가 과외 아르바이트를 해 번 돈으로

동생이 갖고 싶어하던 교재를 사줬을 때

무뚝뚝한 고딩의 그녀가

속으로 많이 울었다고 했다. 

 

이제 다음주면

난 나의 소중한 동생의 박사 학위 수여식을 보며

얼머나 울지 모른다.

 

그깟 학위는 중요한 게 아님을

그녀와 나의 소중한 시간들이 

눈 감는 순간까지 소중한 추억이 될 것을 알기에 

그리고

나보다 백배 천배 훌륭한

그녀를 향한 나의 존경이

그저 못나게 

눈물로 쏟아질 것을 알기에 

 

지금 미리 울어 놓으려 한다.

누가 보면

박사 학위 수여에 통곡을 하는 언니

왜 저러나 

같이 Zoom에 들어온 교수님과 친구들이

당황할까 싶어

눈물을 좀 덜어놓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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