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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avo My life in 밴쿠버

한인타운 살인사건을 떠올리며

by cheersj 2021. 6. 17.

 

20여년 전이었을까

빨간 간판의 대형 한국 수퍼마켓이 생겼다는 소식에

멀리 노스밴쿠버에 살고 있던 우리는 신이 나

주말마다 30분 거리 한인타운으로 장을 보러 가곤 했었다.

 

반가운 한국 과자와 라면 그리고 김치 등을 신나게 사고나면

바로 옆 빵집과 분식점이 같이 있는 작은 식당에 들러

홍합에 국물이 푸짐한 짬뽕 한그릇을 사 먹은 뒤

다음 코스는 비디오 테이프 대여점.  

그 시절엔 한국의 드라마와 쇼프로그램을 녹화한 비디오테이프를 대여해 주는 가게가

한인타운과 메트로 타운 등 곳곳에 있었고

유학생 부부였던 우리는

주말이나 친구들이 모였을 때 한국 오락프로그램을 보며 함께 웃고 떠들며

언어의 자유를 만끽하며 머리를 식히곤 했었다. 

 

그 수퍼마켓을 중심으로 한인타운은 점점 활기를 띠었고

위층으로 연결된 길다란 건물엔 여러 업종의 비즈니스들이 성업을 이루게 되었다.

그 시절부터 자리 잡아온 정겨운 이름들도 있고

이미 운영자가 여러번 바뀌어 흔적조차 없는 곳도 많다.

 

여전히 성업중인 핸드폰 대리점 옆에는 

이제는 사라져버린 건강 식품 판매점이 있었다.

언제나 친절한 미소로 다정하게 대해주시던 건강 식품점 아주머니.

화장기 없는 얼굴에 피부가 반짝거려 젊게 봤지만

실제로는 결혼한 자녀를 둔 이모뻘 연배셨다.

나는 그곳에 꿀을 사러 가기도 하고,

또 장 보고 나면 들러 한국에 보낼 아사이 베리를 사기도 했으며

택배 대행도 해주는 곳이라

한국에 보낼 가족들 선물 포장을 들고 찾아간 적도 많았다.

선물 고른 정성이 너무 에쁘다며 포장도 도와주시고 

배송비가 덜 나가도록 무게를 조절해주시기도 했었다.

 

그렇게 몇년동안 

잊을 만 하면 뵙고 인사하고

또 세월이 흘러 오랜만에 또 가게 되고

어느덧 내가 임신을 한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다음번엔 갓난 아기인 손녀 자랑을 해주시기도 하며

그렇게 정이 조금씩 쌓여갔다.

 

4년 전 어느날 아침 

한인타운에 살인사건이 일어났다고 했다.

건강식품 판매점이라고 했다.

 

오전 10시 가게 문을 열고 정리하는 중

갑자기 침입한 괴한에게 공격 받아그 자리에서 속수무책 쓰러졌다고 했다.

혹시나 했는데정말 그 분이 맞았다. 

게다가 비명소리를 들었지만 그런 상상은 할 수 조차 없었던

옆 팬드폰 가게 직원들도 망연자실했다. 

더 경악할 일은그 괴한이 바로 전 남편이었고

그 나쁜 인간은 행방불명 된 채 아직도 찾지 못한 상태다. 

 

남의 가족사를 감히 자세히 알고 싶지 않고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너무나도 가슴 아프고 기가 막힌 사건이었기에 교민들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고

평소 그분과 정이 쌓였던 주변 상가의 직원들도 모두 충격에 휩싸였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폴리스 라인 앞으로 가지런히 꽃을 놓아

그분이 비록 황망하게 눈을 감으셨지만

그래도 편히 쉬시기를 기도해 드리는 것 뿐이었다.

 

꽃은 날이 갈수록 수북히 쌓여갔고 

그렇게 명복을 빌어드리는 것으로

그리고 범인을 찾아내 죄값을 치르게 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시간과 함께 기억은 흐려져갔다. 

 

어제 아침

나는 마누카 꿀을 사기 위해 새로 생긴 건강 식품점을 찾았다.

화려한 화장에 정장 차림의 여사장님은 친절하고 활달했지만

난 왠지 그 엣날 아주머니가 그리워졌다.

그분이 날 너무 어리게 보고 반말을 섞어가며

마누카 꿀은 없으면서 자꾸 로얄 젤리와 생식 등을 마구 권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푸근하고 꾸밈없고 날 위해주는 이모같던 그분이 문득 그리워졌다.

아, 이렇게 잊고 살게 되는구나

코끝이 찡해졌다.

편히 잠드셨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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