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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avo My life in 밴쿠버

[Short Story #1] 그녀는 내게 즐기라고 말했다

by cheersj 2021. 10. 24.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금요일 오후

나는 불현듯 3주째 차 문옆에 넣어둔 채 전해주지 못한 작은 선물이 생각났다.

점심시간에 간단히 먹을 김밥을 주문해 놓고 

차에 들러 작은 Saje 백에 담아놓은 아이크림과 우산을 집어들고, 그녀에게 향했다. 

회사 앞 작은 산책로를 따라 약 1분을 걸으면 그녀의 작은 Printing Shop이 나온다. 

내가 힘들거나 지칠 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터덜터덜 찾아갈 때면

언제나 별 유난스런 환영인사 없이 담담하게 웃는 얼굴로

따뜻하고 달콤한 커피를 내주는 그녀가 있다. 

 

H는 나보다 여섯살 많은 그러나 내 나이로 보이는 단아한 미모와 따스한 성품을 가진 언니다. 

그녀를 처음 만난 인연은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회사 실장님과의 만남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굴지의 광고회사에서 탄탄대로를 걷던 실장님이,

한국에 잠시 놀러왔던 캐나다 교포인 그녀에게 반해

가족과 직장을 뒤로 하고 밴쿠버로 이민해 새 삶을 시작했다.

 

그녀는 해병대 출신의 듬직하고도 섬세한 실장님과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고

아들 둘이 다섯살과 두 살이었을 때 우리 부부는 처음 언니 댁에 초대를 받았다. 

아직은 렌트를 하고 있지만 아이들을 생각해 작은 하우스를 선택한 

아담하고 아기자기한 하얀 집으로 들어섰을 때

다섯살인 큰 아들 S는 통통한 볼에 매력적인 눈매를 뽐내며 착하게 인사했고

두살 작은 아들 D는 난간을 위태롭게 타고 내려오길 반복하며

어린 아이들 있는 집의 다소 정신없으나 다복한 면모를 과시했다.

아직 아이는 생각도 없던 새내기 신혼 주부인 내게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시선을 꽂아야 한다는 사실에

그녀의 삶은 조금은 어쩌면 더욱, 나와는 다른 삶처럼 느껴졌다. 

 

그때 나의 나이는 젊었고 정신세계는 더 어리고 철이 없었다.

맛있는 요리와 맥주와 담소 게다가 실장님의 기타 연주와 노래에 젖어 시간을 보낼 때

언니는 보이지 않게 그러나 분주히 부엌과 아이들을 향해 왔다 갔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몇년이 흘러 아이들이 축구를 가고 피아노를 가고

픽업을 해야 하는 언니는 

또 예쁘게 차려놓은 상을 뒤로 하고 차 키를 몇번 들고 또 나갔다 들어왔다를 반복하며

그래도 부지런히 나와 와인잔을 부딪히며 웃었고 새로운 안주를 후딱후딱 담아 내오며 웃었다. 

지금 생각 나는데 그 때는 깨닫지 못했던 이유는 뭘까. 

만약 지금의 내가 그때로 돌아간다면

그렇게 앉아서 일 얘기 꿈 얘기에 젖어있을 것이 아니라

언니를 위해 딱 열번은 더 일어났을 것이다. 

이런 마음은 참 부질없고 뜬금없으므로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생각이다.

 

무섭도록 빠르게 세월이 흘러

언니의 아들들은 착하고 바르게 자라 대학생이 되었고 

착하고 성실한 불어 선생님이 되었다.

그리고 나도 조금씩 철이 들어가며 정신을 차려보니

내 아들이 열다섯살이 되고 딸이 열살이 되었다.

 

그 세월동안 내가 힘들고 지칠 때

언니와 실장님은 우리 가족을 불러 

근사한 중국음식 파티를 해주며 응원했고

두고두고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바리바리 싸주며 배웅했으며

우리가 새 집으로 이사왔을 때 첫 방문했던 그날 

짧고 담백한 손편지와 선물로 나를 눈물짓게 했었다. 

 

언니네 Prining shop에 들어서면

우리 아들이 어릴적 쇼핑몰 광고모델이었을 때 찍었던 사진이

한 벽면을 차지할 정도로 크게 인쇄되어 붙어있다.

나의 다섯살 아들을 오랜만에 보며 잠시 울컥했다. 

 

언니 너무 오랜만이네 그냥 보고싶어서 왔어... 애들 잘 있죠?

그런데 그 한마디에

응 이제 다 컸지 뭐... 하며

갑자기 언니가 눈물을 글썽였다. 

당황한 나는 언니 왜, 왜그래 물었다.

언니가 말했다.나 갱년기인가봐...

아이들은 다 커서 이젠 내가 필요없는 듯 보여...

그래서 내가 말했다.

언니, 우리도 그 나이 때 그랬잖아...

아무 위로가 되지 않았다.

실장님도 그렇게 말했다며 다시 얘기했다.

나 갱년기인가봐... 자꾸 눈물이 나... 

 

언니, 하는 그 순간 난 또다시 철없는 동생이 되어있었다.

아무 위로도 해줄 수가 없었다.

그냥 아이들이 아직 어려서 바쁘고 힘든 얘기들을 주섬주섬

수다 떨듯 웃으라고 늘어놓았다.

조금 웃어주던 언니가 내게 말했다.

 

그래도 지금이 가장 행복한 때야,

실컷 즐겨. 꼭.

난 그러지 못했어.

많이 안아주지 못한 것도

그리고 실컷 즐기지 못한 채 흘러가버린 것도 너무 후회가 되고 슬퍼...

 

누구보다도 바르고 성실하게

정성으로 아이들을 키워온 언니가

내게 즐기라고 말했다.

 

지금 이 시간 항상 노력하고 있지만

즐기지 못한 순간들이 더 많은 것 같다.

사랑하는 마음이 앞서 너무 간섭했고

잘됐으면 하는 마음에 욕심이 앞서 더 푸쉬하기도 했다.

잘 자랐으면 하는 마음이 과해 더 엄격한 순간도 있었고

잘 키워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위장한 채 조급하게 윽박지른 적도 많았다. 

 

정작 아직 어린 아이들을 키우는 이 시간들을 즐긴 순간은 얼마나 되었던가. 

 

나의 욕심과 사명감 그리고 목표의식 보상심리

아무 마음도 먹지 않은 채 

그냥 즐겨야겠다. 

그렇게 마음을 먹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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